국역 다소 수정) 위 인용문은 (1) 욕구가 갈구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 그리고 (2) 욕구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에 도달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표준적 해석은 이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석재는 표준적 해석이 (3) 베일의 개 문제에 대해서도 직관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추가적으로 지적한다.이석재는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 이른바 ;;이중 가닥 해석”을 제시한다. 그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단자 안에는 두 가지 구분되는 종류의 욕구인 원초적 힘으로서의 욕구와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가 있다. 원초적 힘으로서의 욕구는 계열의 법칙에 따르며 이 법칙의 조화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 사태를 갈구한다. 다른 하나인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는 그 개체에게 더 나은 상태를 갈구하는 것으로써, 현재 자신이 처한 상태보다 나은 상태의 다음 사태를 욕구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1)~(3)은 거의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가 갈구하는 바는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는 반면, 원초적 힘으로서의 욕구는 반드시 다음 사태를 야기한다. 따라서 (1)~(3)은 원초적 힘으로서의 욕구는 인과에 성공하면서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는 인과에 실패하거나 혹은 충분히 성공하지는 않는 경우라고 설명할 수 있다.이처럼 이중 가닥 해석은 설명적인 면에서 큰 장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의 인과적 역할이 지나치게 작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석재는 이에 대해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가 간접적인 인과력을 갖는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나는 이 욕구가 과연 간접적으로나마 인과력을 갖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에 계열의 법칙에 따라 t2 시점에서 70의 좋음을 지닌 사태가 발생했는데, t1 시점에서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는 90 이상의 좋음을 욕구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단자의 사태 계열은 완전히 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t1에서 이 욕구가 욕구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욕구한 것이 된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욕구하는 것은 인과력을 가질 수 없다. 엑스박스를 갈구하는 욕구는 내가 엑스박스를 갖게 되는 사태에 대해 인과력을 가질 수도 있을 테지만, 둥근 삼각형을 갈구하는 욕구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내가 둥근 삼각형을 갖게 되는 사태를 야기시킬 수 없다. 따라서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는 간접적인 인과력이라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며,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이 욕구는 존재론적으로 잉여적이다. 이에 대해 <더 좋은 상태를 갈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다>라는 전제를 추가함으로써 나의 반론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갈구하는 것이 그 자체로 좋다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전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나는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는 그 욕구를 가진 개체에게 더 좋은 사태를 갈구한다. 그러나 개별 개체에게 좋은 것이 전체적인 측면에서 정말로 좋은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개별 개체들의 파생적 힘으로서의 욕구가 갈구하는 사태가 꼭 정말로 좋은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위 전제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나의 반론은 여전히 유지될 수 있다. 나의 반론을 저지하기 위해 정말로 받아들여야 하는 전제는 <그 개체에게 더 좋은 상태를 갈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좋다>인데, 이는 위 전제보다 훨씬 정당화하기 힘든 전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나의 반론은 이중 가닥 해석에 어느 정도 어려움을 제기할 수는 있어도, 이를 완전히 반박하기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때문에 나는 논문에서 반론을 좀 더 강화시키기보다는 나만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이 해석을 옹호하는 방식을 택한다. 내가 제시하는 새로운 해석은 단자 내부의 복수의 욕구들이 서로 충돌함으로써 다음 사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나의 해석을 ;;욕구의 역학 모델”이라고 부른다. 가령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보자. 나에게 맥주를 마시고 싶은 욕구와 살을 빼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해보자. 그래서 나는 나의 욕구들을 모두 고려해서 카스 라이트를 마셨다. 이 경우, 각각의 욕구들은 자신이 야기하고자 한 것을 ;;완전히’ 야기시키지는 못했다. 만약 내가 후자의 욕구가 없었더라면 나는 좀 더 맛있는 맥주를 마셨을 것이고, 만약 전자의 욕구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예 맥주를 마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두 욕구는 상호 간의 인과적 관계를 통해 다음 지각, 즉 카스 라이트를 마시는 것을 야기시킨 것이다. 욕구의 역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1)~(3)을 포함한 다양한 상황에 대한 통합적이고도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해석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헌적 증거들도 다수 존재한다. 욕구들은 지구의 중심을 향한 가장 짧은, 그러나 항상 최선인 것은 아닌 길을 따르는 돌의 움직임과 비슷하다. 그것은 그것이 바위들과 부딪혀 산산이 부서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다. 반면 만약 그것이 자신이 향하는 방향을 바꿀 재치와 수단을 가졌다면 그것은 그것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때때로 현재의 기쁨[pleasure]을 향해 곧바로 돌진하다가 비참함의 나락에 빠지곤 한다. (NE 189)다양한 지각들과 경향성들(inclinations)은 하나의 완전한 의지(volition)를 생산하기 위해 결합한다. 이것은 그들 사이의 충돌의 결과이다. 거기에는 어떤 감지될 수 없는, 말하자면 우리가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우리를 추동하는 불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NE 192)이처럼 욕구의 역학은 직관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할 수 있으며, 이를 지지할 문헌적 증거도 다수 존재한다.그러나 이 해석을 좀 더 옹호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물음에 더 답해야한다. 첫째, 단자 내부의 욕구가 이 해석이 상정하는 것처럼 복수로 존재하는가? 그렇다. 라이프니츠는 단자 내부의 특정 한 상태에서라도 단자의 욕구는 복수일 뿐만 아니라 무한하다고 말한다.(AG 217/논고 268) 뿐만 아니라 칼린, 컬스터드, 페마이스터 등은 단자의 지각이 미세지각, 감각지각, 통각 등으로 나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자의 욕구 역시 미세욕구, 감각욕구, 의지적 욕구 등으로 나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욕구의 역학은 설명하고자하는 사태를 일으키게 한 욕구들이 어떤 성격을 갖는지에 따라 좀 더 다양한 유형의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둘째, 이 해석에서는 파생적 힘과 원초적 힘의 관계는 어떻게 상정되는가? 살펴본 것처럼, 욕구에 관한 논의에서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나의 해석도 이에 대한 논의를 피해갈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관계를 존재론적 의존 관계로 이해한다. 즉, 파생적 힘(들)은 원초적 힘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 이를 의존 관계로 파악할만한 문헌적 증거는 상당히 많으며, 또한 맥더너 등 많은 해석자들이 이미 이를 널리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나는 파생적 힘이 원초적 힘에 어떻게 의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기존의 해석자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기존의 해석자들은 파생적 힘이 원초적 힘에 순간적(momentary) 부분으로써 의존한다고 해석한다. 즉, 원초적 힘인 사태 계열들 중 특정 한 순간적 사태가 파생적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앞에서 살펴본 표준적 해석에 대한 이석재의 반론을 피하지 못하며, 욕구가 어떠한 한 시점에서도 무한하다는 것과도 정합적이지 않으며, 직관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입장을 거부하고, 한 순간적 부분 내에서도 복수의 무한한 파생적 힘들이 존재하며, 이 힘들이 모두 원초적 힘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즉, 하나의 원초적 힘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는 복수의 힘들, 즉 복수의 욕구들이 충돌함으로써 다음 사태를 야기시킨다는 것이 내 해석의 골자이다. 이에 대해 인과항들이 존재론적으로 의존적인 것이기 때문에, 욕구의 역학에서 상정하는 욕구들의 충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돌은 아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라이프니츠가 <어떤 것의 실재성의 정도는 그것의 존재론적 근본성의 정도와 비례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비록 파생적 힘들이 존재론적으로 의존적이더라도 그에 걸맞는 실재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들 간의 충돌도 어떠한 의미에서는 충분히 실재성을 갖는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이 해석은 정말로 (3), 즉 베일의 개 문제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가? t1에서 강아지가 고기를 먹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t2에서 두들겨 맞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t1에서 이 강아지가 고기를 먹고 싶은 욕구 이외에 다른 욕구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욕구의 역학에 따라 이 욕구들이 충돌한 총합이 다음 사태를 야기시킨 것이라면, 고기 욕구가 아닌 다른 욕구는 고기 욕구를 무력화시킬 정도로 그 개체에게 나쁜 것을 욕구했기에 두들겨 맞는 사태가 야기된 것이라고 말해야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욕구의 역학 모델은 베일의 개 문제를 오히려 더 반직관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 보인다.나는 이러한 반직관성은 모든 것이 단자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라이프니츠의 자발성 논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는 어떤 것이 자발적[spontaneous]인 것과 수의적[voluntary]인 것을 구분함으로써 이에 답하고자한 바 있다.(WF 81)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답변을 욕구의 역학 모델에 따라 재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베일의 개 사례에서 고기 욕구와 또 다른 욕구 모두 그 개의 지배단자에게는 자발적인 욕구이다. 그리고 이 복수의 욕구들이 충돌하여 개가 두들겨 맞는 사태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때 인과항 중 하나인 고기 욕구는 자발적일 뿐만 아니라 수의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인과항은 오직 자발적일 뿐 수의적이지는 않다. 즉, 그 다른 욕구는 개의 지배단자의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개가 특별히 그 욕구를 원하거나 선택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러한 답변은 여전히 반직관적인 면이 있으며, ;;욕구”라는 개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단자의 욕구”는 어느 정도는 기술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으며, 라이프니츠는 이를 통해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욕구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라이프니츠가 생각하는 단자의 욕구 개념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욕구 개념보다 넓은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베일의 문제제기에 대해 자발성과 수의성을 나눔으로써 대답하려고 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욕구의 역학을 통한 설명은 반직관적인 면이 남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라이프니츠의 의도를 잘 포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