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정치다. 국민 국가가 들어선 이래, 건축에서 언어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화의 한 가운데에서 개인의 심미적 감정을 표현해내는 예술조차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 일어나는 공공 영역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 정책은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여겨지는 유산을 보호하고 미적으로 탁월하다고 판단되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장려해왔던 국가와 이를 둘러싼 권력의 끊임없는 관심과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이처럼 국내 정치의 산물이라는 속성을 가진 문화정책은 세계화 시대에서는 국제기구와 회원국 간의 타협과 갈등의 결과라는 성격도 가지게 되었는바 그 대표적 사례가 유럽연합의 문화수도프로그램이다.유럽연합의 문화수도프로그램은 하나의 상징정책으로 회원국 도시 중 두 곳을 매년 ;;수도’로 지정함으로써 범 유럽 차원에서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시민의식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문화정책을 통해 초국적 협력이 여러 정책 영역으로 확장되고 그 정도가 심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주최국은 문화수도프로그램을 통해 도시 홍보 기회를 얻고 문화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는 정책의 창을 열게 되며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한편, 유럽연합의 관료기구인 집행위원회는 이 정책에 개입함으로써 ;;유럽 조약의 수호자’로서 조직의 정당성을 높이고 영향력을 넓힐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이처럼 서로 다른 이해관계 하에서 정책 목표의 모호성과 행위자간 권한 배분에 따른 정책 갈등은 문화수도프로그램의 변동을 추동하는 요인이 되었다. 먼저 정책 목표와 관련하여, 유럽연합은 ;;다양성과 공동의 정체성’이라는 일견 모순된 가치를 추구하면서 정책의 대상을 ;;도시’로 하고 있다. 이는 도시의 ;;영토성’으로 인해 정책 목표의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해석하는 전략이 달라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공동의 정체성’이라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회원국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고유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오인될 소지가 크며 이로 인해 연합 차원의 정책에 대한 비협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행위원회는 다양성을 지역 문화와 연계하여 이해함으로써 국가가 아닌 지역 단위의 행위자와 협력을 강화하려는 최소주의적 연방주의의 전략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은 지역이나 회원국의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방향으로 해석되면서 오히려 연합의 이익에 반하거나 초국적 기구의 권한을 견제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한편, 목표 해석과 적용을 둘러싼 정책 갈등은 주로 회원국의 선호를 대변하는 각료 이사회와 범 유럽적 가치를 추구하는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 양상은 문화수도프로그램에 관한 입법권과 행정권이 불분명하게 배분된 가운데 ;;공동결정절차(co-decision making procedure)’가 정책과정에 도입되면서 부각되었다. 정책의 공간이 주최국의 도시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지역 문화의 영토성으로 인해 도시의 특수성을 강조하기는 쉽지만 공동의 요소에 대한 합의 부재 하에서 범 유럽적 문화를 발굴하고 홍보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공동결정절차의 주요 행위자인 집행위원회와 문화수도가 소속된 회원국 사이에서 ;;주인-대리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집행위원회는 대응 전략으로서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고 정책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처럼 문화수도프로그램은 1985년에 도입된 이래 정책 목표의 모호성과 정책 갈등 양상을 주축으로 변화해왔으며, 이는 회원국과 집행위원회의 정치적ㆍ경제적 선호가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본 연구의 결론이다.